목차
조수미의 업적
조수미에 대한 찬사
"조수미의 목소리는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이는 조수미 자신에게는 물론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금세기 최고의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조수미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다." - 주빈 메타
"그녀의 음색과 음조는 눈이 부시는 화려함과, 은종이 울리는 듯한 명쾌한 정확성 모두를 갖고 있다." - 시카고 트리뷴
"정통 벨칸토 창법의 소프라노 조수미의 음악세계에는 항상 영혼이 깃들어 있다." - 로린 마젤
조수미씨는 1962년 11월 22일 출생으로 본명은 조수경이라고 합니다.
조수미는 81년도에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최고의 실기점수를 받으며 수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1983년엔 재학 중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으로 유학, 보렐리 교수의 지도 아래 3년간 건반악기와 성악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유학 2년만인 1985년 나폴리 존타 콩쿠르에서 우승도 거머쥐게 됩니다.
86년 이탈리아 트리스테 베르디 극장에 '리골레토'의 질다역으로 정식 오페라에 데뷔하며 커리어를 쌓게 됩니다.
수상 및 업적
2006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2006 자랑스런 한국인 문화예술부문 대상
2005 제7회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관악대상
2002 제18회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올해의 여성상
1997 프랑스문화계 비평가선정 성악부문 음반상
1997 제5회 KBS 해외동포상
1996 제1회 한중청년학술상
1996 영국 클래식CD 선정 96베스트셀러 음반상
1995 대한민국 문화훈장
1995 동아일보사 여성동아대상
1994 칠레 최고의 소프라노상
1994 서울공연예술상 김수근상
1993 그래미 어워드 오페라부문
1993 이탈리아 황금기러기상
1992 홍난파기념상 난파상
1986 이탈리아 베로나 국제콩쿠르 1등
1986 남아공화국 프레토리아 국제콩쿠르 1등
1986 스페인 바르셀로나 비냐스 국제콩쿠르 1등
1985 이탈리아 바르첼리보오티 국제콩쿠르 1등
1985 이탈리아 시칠리안느 국제콩쿠르 1등
1985 이탈리아 나폴리 존타 국제콩쿠르 1등
조수미의 인생
조수미의 꿈은 원래 성악가가 아니었다?
사실 조수미의 어머니의 꿈이 성악과였는데 조수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악과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임신했을 때 24시간 동안 클래식으로 태교를 했다고 합니다.
형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피아노를 구입했고, 조수미는 4살 때부터 하루 8시간씩 피아노를 쳤다고 합니다.
피아노 외에도 그녀는 피겨스케이팅 미술학원 등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했는데 피아노 연습할 때는 방문을 항상 잠가 놨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에 몰래 가출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조수미는 다른 아이들처럼 자유 시간이 없다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수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선생님들에게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조수미를 가르치는 선생님마다 수경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노래를 시켜야 한다 라며 조수미의 어머니에게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았던 조수미 최고의 노래 모음 24곡선
조수미의 첫사랑
조수미의 첫사랑은 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조수미는 첫사랑에 공부하는 모습에 첫눈에 반해 다가가기 시작했는데 당시 여자친구가 있던 첫사랑에게 일주일간의 시간을 주고는 여자친구인지 본인인지 결정해서 알려달라는 당찬 모습을 줬고 결국 첫사랑은 조수미를 선택해 사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무렵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수석으로 입학했음에도 사랑에 빠져 공부를 소홀히 해 낙제 점수를 받아 제적당했고 결국 쫓겨가듯 이탈리아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와서 길 한복판에 쓰러지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이런 유학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준 것이 첫사랑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카세트 테이프에 첫사랑은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 주었고 조수미는 외로울 때마다 그 사람의 음성을 들으며 힘을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3개월 후 국제 전화를 통해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게 되었는데 첫 사랑의 새로운 여자친구는 다름 아닌 조수미의 대학교 단짝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를 악물고 독하게 성하게 매달려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수미는 처음에는 첫사랑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사람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고마움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조수미는 십 년이 지나 어느 정도 성공한 후에 첫사랑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는데 무대에서도 안 떨리던 본인의 떨리는 모습을 보고는 바로 끊었다고 합니다.
유학길에 오른 조수미는 1983년 새벽 3시 로마에 처음 도착했을 때 비 오는 거리를 홀로 걸으며 그간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처음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느끼며 미래의 다짐에 대한 일기를 썼다고 하네요.
첫째 어떤 고난이 닥쳐도 꿋꿋이 이겨내며 약해지거나 울지 않을 것.
둘째 절대 약하거나 외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늘 도도하고 자신감을 가질 것.
셋째 어학과 노래에 원통 치중할 것.
넷째 항상 깨끗하고 자신에게 만족한 몸가짐과 환경을 지닐 것.
다섯째 말과 사람들을 조심하고 말과 행동을 분명히 할 것.
그녀는 이때 이것들을 쓰고 현재까지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명문음악스쿨,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하다
조수미는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이라는 명문 음악 스쿨에 지원했는데 면접장에서 입학 시험을 보기 위해 노래를 준비하던 중 교수님이 혹시 피아노 칠 수 있는 학생이 있는지 물었고 조수미가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교수님의 말을 알고 보니 반주자가 결근해 대신 반주를 쳐줄 수 있냐는 것이었고 다른 지원자들의 입학 준비곡이 모두 조수미가 다 아는 곡들이었기 때문에 60명이나 되는 지원자들의 반주를 모두 쳐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드디어 조수미의 차례가 됐는데 조수미의 반지를 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음악원 입장에선 조수미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대단하다고 생각했는지 조수미에게 10점 만점에 10, 플러스 알파의 점수를 줘 합격시켰다고 합니다.
원래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의 교육 과정은 총 5년인데 조수미는 우수한 성적으로 이 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고 합니다.
조수미의 첫 프리마돈나는 오페라 리골레토였다고 합니다.
음악원을 졸업한 이후 부모님께 용돈을 타 쓰는 게 죄송했던 조수미는 상금을 타기 위해 각종 콩쿠르 대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조수미는 이탈리아 5대 극장 중 하나인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에서 파격적으로 동양인 최초로 주연을 맡게 되었는데 클래식의 본고장인 곳에서 타국 사람이, 특히나 동양인 차별이 만연하던 그 시기에 동양 사람이 그들의 무대에 선다는 것은 자신들과 비슷해서는 안 되고 월등히 잘해야만 가능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하면 지휘자가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핀잔을 주는 등 조수미는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견제와 불신 속에서 무대에 오른 조수미는 무대에 오르자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모든 걸 쏟아내며 관객들을 감동시켰고 신인으로서 무대에 섰다가 프로가 돼서 무대를 내려왔다고 합니다.
동료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꽃다발을 존중의 의미로 조수미에게 줬고 그 날이 조수미 인생에서 가장 꽃다발을 많이 받은 날이었다고 합니다.
<마술피리> 밤의 여왕역을 맡은 조수미
조수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을 맡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밤의 여왕 역할은 당시 3명의 소프라노만이 그 높은 음을 소화할 수 있었고, 조수미는 전 세계의 공연장에서 초청을 받으며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해외 평론가들은 조수미의 밤의 여왕을 다른 소프라노들에 비해 낮게 평가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의 딸에게 원수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무서운 밤의 여왕이 너무 꾀꼬리처럼 아름답게 노래를 부른다는 것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밤의 여왕보다 더 어려운 스트라우스의 곡이 있었는데 최고음으로 20분이 넘도록 공연을 해야 하는 최고 난이도의 곡이었다고 하죠.
당시 슈트라우스는 본인이 작곡을 하고도 인간이 이 곡을 부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악보의 일부를 부를 수 있게 수정했는데 수정본마저도 완벽하게 부를 수 있는 성악가가 많지 않았다고 하지만 조수미는 수정본이 아닌 원본으로 부르는 기록을 남겼고 중간 정도만 해도 혹평을 일삼는 해외 평론가들조차도 조수미의 감탄을 넘은 경악스러운 실력에 놀라 조수미에 대해 비평을 넘어선 존재라고 언급하며 조수미는 세계적인 소프라노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라얀과의 인연
조수미는 폼 카라얀과 깊은 우정의 관계라고 합니다.
카라얀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음악가로 20세기 최고의 마에스트로로 불리는데 카라얀이 지켜보는 첫 오디션날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데 캄캄한 관중석 어딘가에서 카라인을 지켜본다는 생각에 웬만해서는 무대에서 긴장을 하지 않는 조수미도 굉장히 떨렸다고 노래를 다 하고 무대를 내려가자 카라얀이 조수미를 불렀다고 하죠.
그리고 카라얀은 평소 당신의 사진을 보며 매일 인사했다는 조수미의 말에 감동을 받아 그녀와 우정을 쌓아가게 됩니다.
당시 최고의 테너였던 플라치고 도밍고와 가의 무대를 준비 중이던 카라얀은 조수미에게 중요 배역을 제의했다고 합니다.
카라얀은 조수미를 아끼던 스웨터를 건네줄 만큼 손녀 딸처럼 대했고 타지에서 힘들어하며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 한 명 없던 조수미와 음악적으로 서로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수미의 연습을 지켜보던 카라얀은 갑자기 숨을 쉬는 게 불편하다는 얘길 합니다.
조수미는 그 모습을 보고 집에 빨리 가서 쉬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완강한 성격의 카라얀은 조수미의 연습을 끝까지 보고 집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tv를 켜니 카라얀이 죽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와 굉장히 허망했다고 합니다.
조수미는 카라얀이 없는 이곳은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며 카라얀과 함께 연습 중이던 가면 무도회를 다른 가수들과 함께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세계적인 마이스트로 게오르기 솔티가 카라얀의 빈자리를 이어받았고 솔티는 가수들을 불러모아 카라인이 죽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오페라를 끝까지 완성하는 것일 겁니다 라며 가면무도회를 이어나가기를 원했고 결국 성황리에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수미는 다국어 능력자
조수미는 굉장한 언어 능력자라고 합니다.
한국어를 포함해 영어 프랑스 독일어 이탈리아로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데 이 중 클래식의 절대 다수가 독일어와 이탈리아로 작사 작곡 되기 때문에 특히 이 두 언어는 원어민에 가까울 정도로 익혔다고 합니다.
오페라인은 노래 말고도 대사를 하는 부분이 많은데 이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대사를 완벽히 구사해야 하고 외국어로 외국인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조수미 입장에서는 노래보다 대사가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독일어를 잘 못하던 시절에는 독일 가곡을 배우려고 마스터 클래스에 들어갔다가 독일어를 못한다고 쫓겨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수미의 취미생활
조수미는 축구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합니다.
로마에서 살았던 덕에 로마의 왕자라고 불리던 프란치스코 토티의 여러 팬이었고 유로 2012 이탈리아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이탈리아의 팬임을 밝혔는데 이탈리아의 공격수 발로텔리가 경기에서 부진하자 자신의 SNS에 프란델리 내가 당신이라면 발로텔리를 빼고 지나탈레를 후반에 넣겠어 라는 글을 올리자 우연히 프란젤리는 그 경기에서 정말로 디나탈레를 교체 투입했고 지나탈레는 동점골을 넣으며 21세기 최고의 승부라 불리던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수미가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과거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팀인 나폴리의 세계적인 공격수 마라도나가 이적했는데 그때 학교에 가서 축구를 모르면 친구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에 축구를 사랑하는 이탈리아인들과 친해지기 위해 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는 경기를 보다가 공연에 지각할 뻔한 적 있었고 러시아 월드컵 때는 우리나라가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격파하자 조수민은 아침에 일어나 그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불렀던 2002 한일 월드컵 타이틀곡인 챔피언 노래를 천장에 올리도록 볼룸을 크게 높여 재생시켰다고 합니다.
조수미가 우리들에게 남긴 말
조수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인생은 참 희한하다.
대학교 1학년 때 심하게 아픈 연애를 하고 공부를 전혀 안 해서 쫓겨가듯 유학을 갔다.
만약에 사랑에 빠지는 대신에 공부를 했다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유학 초기엔 너무 어렵고 외로웠지만 그 시절이 나를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픔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 좋은 음악을 할 수 없다.
요즘 젊은 음악가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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